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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로그인] 아오지 출신 소녀, 9년 간의 탈북 스토리

작성자
관리자
작성자
장수민
작성일
2023-12-20
조회수
496

사람을 통해 통일을 보는시간
통일로그인
내가 눈을 뜨고 다음 날 아침을 해 뜨는 거를 이제 볼 거라는 확신이 없었어요. 못 볼 거라고 생각 확신했죠 오히려
[“다음날 아침에 해 뜨는 것을 보지 못하겠구나“]
[열한 살의 유서 - 김은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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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녕하세요. 저는 열한 살의 유서 저자 김은주입니다.현재는 FSI라는 시민단체에서 탈북민들이 영어 스피치를 통해서 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김은주 『열한 살의 유서』 저자]
제 고향이 한국에서도 이렇게 유명하구나라는 거를 이제 깨달았는데 함경북도 은덕이었어요.
그전에 이름이 아오지였는데 여기에서 한 40~50대 되신 분들은 그러시더라고요.
[고향 ‘은덕’의 이전 이름 ‘아오지’]
학교 다닐 때 잘못한 거 있으면 선생님이 너 이렇게 말 안 들으면 아오지 탄광 보낸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평양 다음으로 유명하구나라고 했는데 그만큼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아사하고 굶어 죽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함경북도 은덕에서 중국과 몽골, 서울까지]
[탈북과 북송, 재탈북 후 한국 정착과정까지 담은 자서전]

Chapter1. 열한 살의 유서
11살에 아빠가 반 영양실조로 인해서 건강 상태가 악화돼서 돌아가셨어요 저희가 더 이상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엄마가 언니랑 같이 라진 선봉에 가서 식량을 구해오겠다고 빠르면 하루 길면 3일 걸린다 하고 떠나셨거든요
그때 당시 저한테 북한 돈 15원을 주셨는데 그 15원 가지고 엄마가 떠나자마자 장마당으로 갔어요 거기서 제가 제일 좋아했던 두부 한 모를 사서 엄마 올 때까지 마음 같아서는 아껴 먹어야지 했는데 제가 1시간도 안 돼서 다 먹어 치운 거죠
그때부터 엄마를 기다리기 시작했어요. 3일 지나고 4일 지나고 5일 지나고 6일 지나고 그런생각이 들었어요 ‘아 나 내일은 엄마 마중 못 가겠구나’ 너무 힘이 없었어요.6일을 굶다 보니까 그러다가 너무 억울했어요. 그러니까 죽는다는 게 억울했다기보다도 엄마한테 버려졌구나.혹시 내가 죽더라도 엄마가 돌아온다면 내가 엄마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엄마 마중 몇 번이나 갔었는지를 알아줬으면 좋겠는 마음에 이제 앉아서 이제 유서를 쓴 거죠.
참 민망하게도 엄마가 그날 돌아오셨어요 돌아오셔서 제가 쓴 그 쪽지를 보시고 했던 첫마디가
“다 같이 죽자”였어요 엄마가 빈손으로 이제 돌아오신 거죠.
[프랑스 작가와 공동집필한 책]
[한국보다 프랑스에서 먼저 출간]
[8개국 언어로 출간, 해외 독자들에게 먼저 알려져]
제 책이 한국으로 들어왔을 때 자서전이 아니라 정치 코너에 가 있었어요.참 아이러니하고 슬픈 것 같아요. 왜 북한 인권 혹은 북한 이야기를 하면 정치적이어야 되는 거지라는 아쉬움도 있는데 누군가 북한의 이야기 그리고 탈북민들의 중국에서 삶을 이야기해야 된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나로 선택되어 되었다면 이거를 거부할 이유는 없다라고 생각을 해서 함께 이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Chapter2. 탈북민의 경험,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노력
저희 단체를 자랑하자면 탈북민들이 영어 스피치를 통해서 자신의 역량을 강화하도록 돕고 있습니다또 다른 한편으로는 탈북민들이 직접 자신의 경험을 영어로 나누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북한의 실태를 알리는 역할도 하고 있고요
또 한편으로는 저도 그렇지만 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눔으로 인해서 제 상처가 치유가 되더라고 그런데 계속해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 인해서 언젠가는 이야기를 꺼내게 되고 꺼냄으로 인해서 심적 치유를 얻게 되더라고요.그래서 저는 저희 단체가 탈북민의 역량 강화 심리치유 플러스 국제사회의 북한 인권 실태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Chapter3. 그리운 고향, 변하 것과 변하지 않은
중국에서 살면서 가끔은 북한을 그리워했어요. 왜냐하면 고향이니까 어릴 적에 좋았던 추억도 있었으니까 아빠랑도 추억도 있고 순수했던 그 친구들과의 추억도 있고 근데 강제 북송되고 나서 아 여기 내 고향이긴 하지만 내가 살 수 있는 곳은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이제 뼈저리게 느꼈던 것 같아요.
탈북 여성이든 남성이든 상관없이“인간 쓰레기만도 못한 것들”이 그들에서 나오는 말이고, 모욕을 당해야 되고 다 아시다시피 신체검사, 알몸 검사는 미성년이건 성년이건 상관없이 이루어지면서 여성으로서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감정을 억눌러야 되고 표현했을 때 오히려 돌아오는 건 매질 뿐이었어요

Chapter4. 북한이탈주민으로 살아가는 것
탈북자 라고 하면 제 주변의 친구들도 그렇지만 꼬리표라고 인식을 하더라고요 그 네이밍 자체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 인식을 하지만 저는 그게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탈북자라는 의미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 사회에 왔는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거기에 플러스 탈북민으로서 그 과정을 거친 사람으로서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되는지에 우리의 역할까지 저는 담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거에 부끄러워하지 말고 거기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서 수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북한 은덕에서 11살의 소녀가 죽음을 직감하며 고사리같은 손으로 유서를 써나갔던 시기, 북한은 고난의 행군(1996~2000년)을 겪고 있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당시 북한은 식량난으로 인해 33만여 명의 아사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

통일로그인 PD 이은지 / 작가 김재순 / 촬영 최준우 / CG 전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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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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